29. “무슨 일인데요.” 내가 묻자 정서린은 대답하는 대신 시선을 돌렸다. 그 시선을 따라가니 거기에 벽시계가 걸려있다. 막 11시가 된 참이었다. “나 TV 틀어도 되니? 지금쯤 나오고 있을 거 같은데.”
28. 나는 부엌을 대강 치운 후 찬장에서 위스키를 꺼내왔다. 잔은 하나만 가져갈까 하다가 하나를 더 챙겼다. 정서린이 나를 빤히 보는 게 느껴졌지만, 무시하고 두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. 아니나 다를까, 입 다물고 있는 게 이상했던 정서린이 샐쭉하게 쏘아붙인다.
27. 누구지? 하고 생각하기도 전에 벨은 딩동- 딩동딩동- 하고 성급하게 여러 번 울린다. 오늘 진짜 무슨 날인가.
26.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기만 했다. 변명의 말도, 설명의 말도 쉬이 떠오르는 게 없었다. 그러자 한유란은 그런 나의 망설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단번에 잡아챘다.
25. 나는 한유란의 손에 있는 머그잔을 잡아 그대로 당겼다. 한동안 버티며 실랑이를 할 것 같던 한유란은 의외로 순순히 머그잔을 건넸다. 머그잔에는 이미 샴페인이 반쯤 따라져 있었다. 고개를 들자 한유란은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병 역시 식탁에 고이 내려놓는다. 그러더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경우라고는 없는 사람처럼 굴던 한유란이 사과까지 한다. “미안해요....
24. “방금까지 성희롱으로 고소하려던 직장 상사, 뭘 믿고 집 안으로 들여요? 내가 무슨 짓 할 줄 알고.”
23. “무엇보다 내가 원할 때 한 잔 사기로 했잖아요.” 맞아. 그랬던 거 같기도 하다. 아직도 확실히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, 한유란이 없는 말을 지어낼 거 같진 않았다.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, 왜 하필 지금이지?
22. 그냥 실수이길 바랐다. 장난이어도 상관없었다. 하지만 내가 반응하지 않자 벨 소리가 재촉하듯 다시 울렸다. 나는 놓아뒀던 알 없는 안경을 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. 그리고 인터폰으로 살그머니 걸어가 화면을 살폈다. 화면으로 공동현관의 모습이 보였지만, 그 자리에 사람은 없었다. 정말 잘못 눌렀나? 두 번이나? 미간에 힘을 주며 화면을 조금 더 물끄러미...
21. 사랑이라는 감정은 온전히 발현된 사람의 몫. 그 말을 소리 내어 중얼거리다가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눈을 꾹 감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. 짜증 나. 왜 하필 오늘 저 인터뷰를 봤을까. 분명 눈을 감았는데, 눈앞에는 여전히 한유란이 있다. 네임을 지우겠다고 말하며 자신만만하게 웃는 얼굴이. 그 표정이 너무 얄밉다. 근데 얄밉기만 하다. 얄미움도 미움이니...
20. ‘사장님. 그러면 저는 먼저 차에 가 있을게요. 이야기 나누다가 오세요. 아직 다음 일정까지 여유 있으니까 천천히 오셔도 됩니다. 혹시 늦으시면 연락드릴게요.’ 두 사람만의 세상을 깨뜨린 건 실장님이었다. 한유란은 그제야 의사를 살짝 밀어내더니 실장님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.
19. 3시간만 기다려도 된다고 하니, 잠시 쉬다가 가면 되겠다고 생각했다. 눈이라도 좀 붙였다가 가자고. 그러나 침대에 누워 눈을 감자마자 잠잠하던 어깻죽지의 통증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. 그전까지는 그저 아프구나, 하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렇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. 이 통증이 내 근육이나 뼈에 이상이 있어서 아픈 게 아니라 네임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심...
18.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. 네임이라니? 만화나 드라마에서나 보던 네임? 네임현상이라고 알려진 그 네임? 하지만 농담이라고 하기엔 의사의 목소리가 너무 진지했다. 거기에 더해 ‘이거, 진짜 네임 같은데요?’ 하고 중얼거리듯 말할 때는 심지어 뭔가 새로운 걸 발견한 것처럼 조금은 놀라고 들뜬 목소리였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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